사사기에는 특징이 반복되는 사이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변의 이웃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고통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사사를 세우시고, 그 사사를 통해 구원해주시는 사건이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삿6:1)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미디안 손에 넘기셔서 고통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파종 때가 되기만 하면 미디안 족속이 쳐들어와 빼앗아 가고 연이어 아말렉 족속과 동방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빼앗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진 것을 여기저기 모두 빼앗기자 궁핍함이 심했다고 합니다(6절). 그러니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피해서 산에서 웅덩이와 굴을 파서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2절). 이때에 기드온도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 몰래 숨어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11절). 포도주 틀에 갇혀 있는 기드온의 모습 속에서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교회 다닌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포도주틀에 갇혀 있는 기드온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포도주 틀에 숨어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절)라고 반응하였습니다. 기드온의 이 모습은 은혜 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비하입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께 대하여 불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1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고자 하실 때 우리는 작고, 연약하다는 핑계로 우리 자신의 ‘포도주 틀’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지혜 있는 자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 바닷가에서 미천한 어부들와 천대 받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주십니다(시편18편).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1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기드온은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17절). 기드온의 이 거듭되는 표징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확실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요구들을 그대로 들어주셨습니다(38절). 하나님께서는 사방이 아무리 바짝 마른다 하더라도 양털만은 촉촉이 젖게 이슬을 주시고, 반대로 세상이 아무리 풍요롭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마르게 하시면 바짝 마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 임했고(3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고 남은 300명의 용사들과 함께 말씀하신대로 미디안의 사람들을 ‘한 사람 치듯이’ 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300(이스라엘):1(미디안)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미디안 치하의 고통과 어려운 환경에서 기드온이 겨우 생각한 것은 밤에 포도주 틀에 숨어서 드러내지 않고 밀을 타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는 큰 용사다. 내가 함께 하겠으니 그 포도주 틀을 깨고 나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도록 불과 양털의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기드온과 같은 ‘큰 용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나의 포도주 틀을 깨치고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승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