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메이커 2020.02.23 14:37 조회 수 : 483
예배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jQaDZrDDaqU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 시 44:17~26
먼저 영상으로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어서 마음이 착찹하고, 답답한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코로나19(COVID-19)로 인하여 교회가 부득이하게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우리 비산동교회 당회는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밤까지 두 번에 걸쳐 긴급당회를 가졌습니다. 당회의 결정사항은 이미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 통지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첫 번째 긴급당회(목요일)를 통해서는 주일 예배를 제외한 모든 예배를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급격한 확산으로 인하여 금요일 저녁에 2차로 긴급당회로 모였고, 최종 결정은 정부의 시책과 총회, 노회의 공지에 따라서 주일 낮 예배 조차도 2주간 중단을 하고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당회가 최종 결정을 한 후에 제 마음에 울컥하는 것이 있어서 그 자리를 빨리 일어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 교회는 예배를 쉰 적이 없었습니다. 일제의 그 혹독한 탄압과 온갖 압박, 핍박 가운데서도 교회의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예배당 문에 못질을 해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주의 전을 찾았고, 찬송을 불르며,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6.25전쟁 중에도 예배는 쉬거나 중단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역사이고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 간에 밀착하면 더욱 전염성이 강해서, 부득불 예배를 이렇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조금 잠잠해지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신천지 집단으로 인해서 대구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불안과 공포를 주고 있습니다. 확진자가 100여명을 헤아리는 그런 상황까지 가버렸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참 그렇게 한국 교회에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악한 영적인 바이러스로 인하여 추수꾼이다 뭐다 해서 신앙을 혼란스럽게 하고 기존의 교회를 어지럽혔는지 모릅니다. 거기에 더하여 육체적인 바이러스까지 퍼뜨리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렇게하고도 교주가 한다는 말은, 마귀가 신천지를 시험 하고 있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마귀의 짓을 하고 있는지, 누가 사탄의 하수가 되어서 이런 일을 퍼뜨리고 있는지 묻고싶습니다. 신천지에 대해서 정부는 좀 더 강력한 방법들을 간구해 주기를 촉구를 합니다. 대구 시장은 뭘 하는 겁니까? 여러 다른 도시에서도 서울, 경기도, 충주에서도 신천지를 폐쇄하고 하는데 대구는 잠잠하며,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탓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런지를 시편44편17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우리 영혼에 울림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17절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은 그 앞에 9절에서 16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9절의 말씀에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절은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15절은 말합니다. “수치가 내 얼굴을 덮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환난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시인의 모습입니다. 그런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런 때 시인은 어떻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런 때 우리 믿음의 자세는 어떤 믿음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일찍이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 이것을 내가 어떻게 해석을 해야합니까? 어떻게 바라보아야 됩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던 하박국 선지자는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우리의 신앙적인 자세를 옷깃을 가다듬어야 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다시 17절의 말씀으로 돌아가면 그는 무엇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다짐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지만 우리는 주를 잊지 아니하겠습니다.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지 마십시오. 중요합니다. 붙드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의지해야 됩니다.
시편 44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절은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지만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조상으로부터 들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귀가 아프게 들었다. 그때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서 우리 조상들 이 땅에 뿌리 박아 살게 해주셨다. 다른 민족들은 두 번째로 하고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3절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 까닭으로 ‘우리에게 은혜 주시고 복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5절은 “적을 밟아서 우리에게 승리를 하게 하여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에서나 가정에서나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비산동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해 주신 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축복과 보호하심과 지키심에 대하여서 잊으시면 아니됩니다. 혹여 지금 힘들고 어려움으로 인하여서 지난 날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을 잊어 버릴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귀로 들었던 이야기들이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혹독한 일제 아래에서도 한국교회는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정말 목숨으로써 신앙을 지켜내었습니다. 그 험난한 6.25전쟁 가난으로 힘들었던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주님을 더욱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아 대한민국! 사랑하는 우리 조국! 그리고 우리네 삶. 오늘 이 만큼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신명기 32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백성들을 모아놓고 고백의 설교를 했습니다.
신명기 32:7-10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자손들은 조상들에게 물어보고, 부모들은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누가 우리를 지켜주셨느냐? 눈동자 같이 누가 우리를 보호하여 주셨느냐?를 전승하라는 말입니다. 그 신앙을 물려주라는 말입니다. 그 때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들에게 들려주라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그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때를 아십니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 같이 우리 나라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 이십니다. 함께 하여주십니다.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사스때도 잘 극복하고 지나왔습니다. 메르스라는 낙타에서 발생한 그 병으로 전세계가 전전긍긍할때도 잘 극복해내었었습니다. 사람들의 노력과 애씀이 있었겠습니다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지켜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이번에 이 코로나 사태도 넉넉히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더 주님께 나아갑시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18절의 말씀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도 내 마음은 위축되지 않겠습니다. 내 걸음이 주님의 길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어렵고 환난을 당하면 마음이 위축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잘 가던 사람들도 그렇게 시험의 덫에 걸려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마음이 위축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떨지 말라. 겁내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그런 주님과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여기 “마음이 위축되다”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다쇠르 아호크’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잔뜩 움츠려서 뒤로 물러난다’는 말입니다. 웅크려서 뒤로 설설 물러나는 것. 그래서 개역 한글판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퇴축되지 아니하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러날 퇴(退), 웅크릴 축(縮), 그 번역이 더욱 정확한 번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조심은 하시되 너무 위축되지 않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흔히들 우리 그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동네에서 개가 짖습니다. 달려나옵니다. 그런데 그 개가 누구에게 달려들고 누구를 무느냐? 퇴축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이 위축되는 자들입니다. 겁을 먹어서 뒤로 웅크리고 슬슬 물러나면, 정말 신기하게도 개는 그런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딱 제자리에 서서 똑바로 쳐다보고 당당하게 대하면, 개들이 깨갱거리면서 꼬리를 감추고 물러납니다. 개도 심리전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병마도 심리전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이러스도 심리전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누가복음에서도 “너희는 스스로 조심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위생은 자기가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런 비상의 방법으로써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너무 쫄지 맙시다. 너무 위축되지도 맙시다. 시인은 단호하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은 위축되지 않겠습니다. 우리 걸음은 주님의 걸음을 떠나지 아니하겠습니다.” 그런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감으로,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잘 극복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시편 44편의 마지막 부분인, 23절~26절을 보면, 시인은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 고라 자손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주님 깨십시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십니까? 25절에서는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영적으로도 힘들고, 진흙 속에 파묻힌 것 같으며, 몸이 땅에 얼어 붙어버렸다고 말합니다. 26절에서는 “일어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렇게 시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그것도 역시 시편의 표현입니다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주님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주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표현의 간절함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주여 깨소서”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우르’입니다. ‘우르’라는 말은 재미가 있네요. 힘든 가운데도 웃어봅시다. 군대가 우르르 적진을 향하여 돌격할 때 쓰는 단어다. 그렇게 되어 있네요. 주님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일어나 주십시오. 주님의 힘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다시 여러분 군대가 ‘우르’, 우르르 일어나서 적진을 향하여서 돌진하는, 그때 쓰는 단어가 주여 깨소서! “아도나이 우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집에서라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도움을 정말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신앙을 일으킬 때입니다. 기도의 간절함을 회복 할 때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의 줄을 붙잡아야 됩니다. 한국 교회는 어쩌면 간절함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를 통하여 신앙적인 교훈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일어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매달릴 때는, 의지할 때는 주님의 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주님의 그 우리를 사랑하여 주심으로 주께서 우리를 그 ‘헤세드’의 사랑으로써 품어주십시오.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스펄전은 그렇게 늘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만큼 안전한 도피처는 어디에도 없다. 애기가 엄마의 품에 안기면 그렇게 편안함을 느끼듯이 이제 그 주님의 품속으로 우리를 품어 주십시오. 마지막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히브리 말은 ‘쿰’입니다. ‘쿠마’라는 단어에서, ‘쿠마’라는 단어는 이제 행동하기 막 시작하는 거예요. 잠잠했던 그래서 ‘우르’라는 단어를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그래서 주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쿰’ 잠자는 소녀야 일어나라. 그 쿰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더 재미있게 되어 있는데 앞에 ‘깨소서’는 AWAKE, 밑에 일어나소서는 'ARISE' 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일어나다’는 말입니다만 단어가 뜻이 다르잖아요. 잠에서 깨는 것이 awake라면 arise는 잠에서 깨어서 막 활동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맺겠습니다.
시편 91:1-7절 말씀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아멘
역대하 20장의 말씀을 보면 그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그렇게 해서 나라를 잘 이끌어 갔는데 암몬 모압 연합군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럴 때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아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너희는 움직이지도 말아라. 내가 너희를 보호하리라. 승리케 하여 주리라.”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군대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이 시기를 잘 지나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삼가서 지키셔야 됩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 마음이 너무 위축되지 마십시오. 믿음이 퇴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주의 말씀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와서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귀한 신앙적인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