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메이커 2020.03.01 17:04 조회 수 : 421
예배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MODDItfrfug&feature=youtu.be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 고전 1:17~18
고전 1:17-18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주일은 사순절 기간의 첫 번째 주일이면서 삼일절 기념 감사 주일이고, 또 코로나19(COVID-19)라는 전염병으로 인하여서 영상예배를 두 번째로 진행하는 주일입니다. 마음이 많이 무겁고 답답한 심정 가눌길 없습니다. 목사인 나는 이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자문할 때에, 참 무기력하며 답답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에서 ‘기도하기를 결심’한 이후에는 성도들과 교회, 그리고 이 악한 전염병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다시 힘들거나 위축되지 않고, 또 우리 영혼이 피폐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신앙과 그 영혼이 피폐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늘 성도님들과 함께하던 새벽 재단을 목회자들만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기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담임목사라는 책임감으로 교회를 지킨다는 마음의 표현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서 좀 더 간절한 마음을 드리는 심정으로 한 주간을 교회에서 잠을 자면서 매달려 기도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조금이라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했고, 특별히 “주님 이러한 우리의 애씀을 보시고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주여 우리에게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떠올리면서 간절히 매달려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야 비로소 성전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었는데’라는 말처럼, 저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에서야 성전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전을 잃어버린 후에 더욱 간절하게 성전을 그리워했던 그 유대인들의 심정이, 어쩌면 오늘 가정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성전을 지척에 두고 그 성전에 나아가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애타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성도님들이 더 보고싶고 그리웠습니다. ‘게토’라고하는 한정된 구역에 모여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그 한계 상황 속에서도 ‘회당’이라는 장소를 만들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제사를 대신하는 말씀의 연구라는 새로운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러한 영상예배라는 형태로 더욱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과 뜨거움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운 환경을 당하여서 오히려 더욱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좀 쉬자’라는 사탄의 속삭임을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시고, 주의 성전과 하나님에 대한 더 간절함으로 나아올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고라 자손은 시편 84편에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비록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립니다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는 성경의 고백처럼,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아주시고, 시온의 대로를 더해주시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목회했던 고린도교회를 향하여서 보낸 편지입니다.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진 아픔을 겪고있었던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을 다마 보낸 편지였던 고린도전후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회복하십시오”, “화목하게 성도들의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주의 치유의 은혜로 다시금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교회로 서십시오”라는 것이 고린도전후서의 전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권면하기를 그 첫 번째 들고 나오는 단어가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영어 성경에서는 “the message of the cross”라고 했고, 헬라어로는 “로고스 호 스타우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까? 당시 이 성경이 쓰여질 때 이 십자가는 ‘저주’와 ‘치욕’을 상징하는 ‘죽음’의 ‘사형틀’이었습니다. 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것을 실행할 때에,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럽게 죽일까’를 연구하여 만든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사회적인 두려움이 되게 하고 교훈이 되게하여서, 자기들의 통치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 당시 지배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생각만해도 저주스럽고 보기만해도 끔찍스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 저주스런 십자가를 진 것은 저와 여러분의 죄값을 대신 지신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 그 십자가에서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를 우리가 볼 수 있다. 사랑과 구원의 상징이 이제는 그 십자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고백합니다. 이 사순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대속하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의 제물이 되어서 저와 여러분의 죗값을 그 십자가에서 지불하여 주시고 그 값으로 인하여서 우리가 구원 받게 되었다. 그 값으로 인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 사순절의 첫 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이 십자가의 은혜가 누구에게 임하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내용(의미)은 ‘멸망하는 자’와 ‘하나님의 능력의 은총’으로 나뉘어서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나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십자가에서 이적과 기적으로 나타나기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조롱하며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그랬듯이, “당신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해 보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라고 세상 사람들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표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는 영광이 나타나고 승리가 나타나야만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 십자가에 달린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어떻게 메시아가 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거리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넘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은 지혜를 구하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지혜로 보았을 때 십자가는 가장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 이것이야 말로 미련한 것이다!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도 이방인들이 구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신앙을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믿지 못하고 머리로 자꾸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이건 말이 안 돼 이건 미련한 것이야. 어리석은 자들이 믿는 그런 하나님이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표적으로 십자가를 보는 유대인들이나, 지혜로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헬라인들과는 달리,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24절에서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지혜를 뛰어 넘고, 표적을 뛰어 넘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고백과 감동이 나오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 첫 주일에 우리에게 이 은혜가 임하고, 이 믿음으로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다른 강도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거늘 이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믿음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영상으로 함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립니다마는 다시 한 번 이 믿음의 고백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은혜가 나의 것으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로 고백을 하고, 그 십자가의 강도처럼 그렇게 고백했을 때에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내가 강도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마땅히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 대신에 주님께서 달려 주셨습니다. 내 죄값을 주님께서 대신하여 값을 치러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믿을 때에, 그 십자가의 은혜가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임하여 주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며,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사순절 첫 주일에 여러분 다시 이 신앙을 확실히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의지로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지혜를 뛰어 넘게 했으며, 이성을 뛰어 넘게 했고, 표적을 뛰어 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믿어 졌을 때를 성경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입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뛰어 넘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합니다. 삼일절 기념 주일에 영상으로 드리는 그런 이 두 번째 주일 예배에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오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말라. 17절에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표현을 헬라어로는 ‘케노’라고 했는데, 이는 ‘공허하다, 텅 비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허한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분 계십니까? 또 나아가서 십자가를 공하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은, 어쩌면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다시금 우리가 회복하고 붙들어야 하는 것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말의 공허함으로 하지 아니하고 십자가 신학을 재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믿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유대인의 표적을 뛰어 넘고 헬라인의 지혜를 뛰어넘고 참으로 신앙의 기본, 근본,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영상예배 준비를 위해서 당회원 장로님들 몇몇분이 이렇게 함께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영상 예배나 인터넷을 통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에 대한 논의도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그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6.25전쟁의 그 죽고 사는 와중에서도 십자가를 붙들었고, 예배당 문을 닫지 아니했었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면서 지켜온 한국교회의 예배 전통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으로 그 의미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 14:18-19)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할례를 받든지, 음식을 먹든지 안먹든지 모든 기준은 이웃에 대한 건덕(建德)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영상으로 드리는 안타까움이야 그 영적인 황폐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당회는 어렵게 이를 결정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회적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 혹여라도 피해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회가 사회와 책임과 아픔을 함께하는 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 본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하는 이 사회와 민족에 대해서, 특별히 창궐하는 대구지역의 코로나의 아픔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하는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교회는 함께 모여 드리는 은혜의 예배를 잠깐 중단하고, 영상예배로 이렇게 대처합니다. 공허하지 않는 십자가의 정신은 이렇게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삼일절 기념주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제하에 그 어려웠던 시기에 민족과 함께 했습니다. 교회가 불타는 가운데도 예배당 문에 못질이 되는 가운데도, 민족 교회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 울고 웃는, 민족의 십자가를 지는 교회였습니다.
십자가를 헛되이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가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고 할 때에 어머니 리브가가 이야기합니다. 야곱아 야곱아 네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라 야곱이 이야기를 합니다. 축복은커녕 아버지의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신앙의 어머니 리브가는 말합니다. 저주가 있으면 내가 받을 테니 너는 축복을 받으라.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정신입니다.
참된 십자가 신앙의 삶,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을 모세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서 하나님의 책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울부짖어 하나님 앞에 나아왔고, “주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저 백성은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영상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신학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비산동교회 성도님들도 함께 가정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이렇게 함께 하는 마음으로, 또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써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어렵고 힘든 때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 138:3)
영혼의 힘을 잃지 마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외로울 때일수록 다윗처럼 더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그럴 때 주님께서 응답하여 주시고 다윗의 영혼에 힘을 주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한국 교회에 새로운 힘을 주어서 강하게 하시고 더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나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고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 키워서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