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메이커 2020.03.22 17:33 조회 수 : 336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mjqCxrkKHBk&feature=youtu.be
다시 나오미로 / 룻 1:18~2:4,12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은 왔는데 봄같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이미 성질 급한 목련들은 피었다가 지기도합니다만, 우리의 현실은 한 달여 넘게 예배당의 문을 닫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도 답답한 상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서 드리는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만은, 불편한 마음으로 인해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이 사태가 하루 빨리 끝나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그 날이 오기를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원래 농사가 잘되는 지역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다시 풍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할 때에, 초라한 행색을 한 나오미와 룻이 나타났습니다. 그리 크지 않는 동네인지라 베들레헴 언덕길을 넘어오는 저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19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저 초라한 행색의 여인이 십 년 전에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지방으로 내려갔던 그 나오미가 맞는가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나오미에게 남편도 있었고, 아들들도 있었으며, 나름대로 풍족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저 행색이 나오미가 맞단 말이냐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듣고있던 나오미는 저들에게 가까이 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십시오. 나를 마라라 부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 ‘희락’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삶은 이름 그대로 기쁨과 희락이 풍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의 흉년을 피하여서 모압 지방까지 이민을 간 것은 더 잘 살아보겠다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이제는 괴로움과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고, 더 이상 나는 나오미가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십년 동안에 나오미는 모압지방에서 남편도 잃고 재산도 잃고, 두 아들까지 잃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 이런 우리 나오미의 모습과 고백을 통해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나오미의 고백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20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의 이 자기 인식과 고백이 중요합니다. 오늘 나의 마라 같은 삶(불행)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답을 찾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찾았습니다. 흔히들 우리는 나오미와 같이 행복한 삶을 살다가 마라와 같은 어려움과 힘듦을 당하면 하나님을 탓하기도 하고, 남을 탓하기도 하면서, 그 누구를 향해서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답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이것이 나오미가 깨달은 신앙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나오미를 다시 회복을 시킵니다. 답을 알면 이제 행동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내린 결단은, 베들레헴으로 돌아 가자였습니다. 자기 불행에 대한 신앙적인 수용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말하기를 “전능자가 나를 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비워버리게 하셨다.”라면서 자기 불행에 대한 신앙적인 수용을 통한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징계하실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징계에도 종류가 있어요. 때로는 버려두는 사람들도 있어요.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잘 7절의 말씀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한다는 말입니다. 잠언의 말씀과 같이, 아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잘 되기를 바라면서 회초리를 들듯이,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해주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징계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로마서 1:28절의 말씀에 보면 버려두는 자의 삶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때로는 버려두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둡니다. 왜냐고요.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버려둔 자의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0절에서는 이렇게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데 우리로 하여금 나로 하여금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 징계하고 회초리를 들 때가 있습니다. 나오미는 바로 자녀들을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 코로나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냐? 여러 가지로 해석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신앙적인 수용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달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모압에서 살지는 않았나요?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마음대로 살지는 않았나요? 겸손해지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 것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삶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질병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 ‘바로 왕’과 ‘다윗 왕’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항복을 받아 내시기 위하여서 애굽에 질병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바로 왕은 마음이 더 강퍅해졌고, 결과적으로 애굽의 장자를 잃기까지 그 열 가지의 재앙을 받는 모습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 왕은, 그의 교만으로 해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인구조사를 실시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윗의 선택으로 인해서 큰 질병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24:10절과 25절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10절)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
오늘 우리에게 다윗의 그 자세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나오미에게 그 자세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을 어떻게 하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나오미가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마라의 고통을 갖고 있습니다만 다시 이름 그대로 ‘기쁨’으로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며,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자기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을 깨닫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코로나 사태의 고난을 신앙적인 유익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의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궤도 이탈하시면 안 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살아야 됩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의 믿음의 길, 인생의 길의 자세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삶의 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다. 갈잎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요나를 잘 압니다. 하나님의 사명자였던 그가, 니느웨로 가야했는데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의 길을 이탈하였을 때에 사고가 나게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람을 불게하고 파도를 동원하셔서 그 요나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지금 우리가 ‘마라’의 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말씀 준비했습니다. 주님! 지금 우리가 ‘마라’(고통)입니다. 지금 우리가 괴롭습니다. 지금 우리가 힘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알고, 겸손하게 낮출 수 있게 하소서.
여기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을까?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고약한 신천지 사람들. 그 거짓 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영적으로 악한 바이러스를 퍼뜨리더니 이제는 육체의 질병 바이러스까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나를 다 비워버리게 하셨다. 전능자께서 나를 치셨다.’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에, 새로운 나오미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 22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아멘
나오미는 빈손으로 홀로 다 잃어버리고 외롭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10년 세월에 다 잃어버렸는데. 그 모압에서 나오미가 얻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모압 여인 룻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두 개의 단어가 중요한데, ‘함께’라는 단어와 ‘시작할 때에’라는 단어입니다. 함께 온 룻은 나중에 4장의 말씀에 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오미, 그대의 며느리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다.”라고 칭함을 받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다시 그 집안을 일으키는 며느리라는 말씀입니다. 아시는바대로 다윗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됩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는 이방여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족보에 드는 신령한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 며느리와 함께 돌아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룻이 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함께 베들레헴으로 들어왔을까요? 모압 여인인데. 베들레헴까지. 그 시어머니에게 무슨 기대할 것이 있거나 무슨 가진 것이 있었겠습니까? 자기 육체의 노동으로써 보리 이삭을 주어야 하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라. 돌아가라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내보내려는 시어머니에게 기가막힌 룻의 그 고백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17절)
이 아름다운 고백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며느리 룻의 눈에는 그 시어머니의 삶이 불행으로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고통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며느리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머니라면 따를 것이며, 봉양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볼까요. 어머니 가시는 그 곳에 나도갑니다. 어머니 머무시는 그곳에 나도 머물고 싶습니다. 그 어머니의 백성은 나의 백성입니다. 어머니가 믿는 그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머니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묻히기 원합니다. 어찌 이런 고백을 그 룻의 입에서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10년 세월을 통해서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풍족하게 나가서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마는, 그 힘든 가운데서도 잃어버리고 놓쳐버리고 ‘마라’와 같은 삶 속에서도 나오미는 그 며느리에게 믿음의 신앙의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누구 원망하거나 탓하지 아니하고 다 받아들이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어머니라면 내가 따르겠다. 이런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어야 되겠다는 고백으로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좀 더 들어가보면, 보아스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서 격리되어지고 외출도 삼가고 사람 만나는 것도 꺼리게 되고 그러나 이럴 때에 정말 우리가 붙들어야 될 것은 “함께하는 마음”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기도로 함께 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심정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목사님들과 릴레이를 하면서 기도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려울 때에 함께 하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또 한 며느리가 있었는데 오르바라 그랬습니다. 그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5절)
믿음의 끈을 놓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룻과 같은 며느리이며, 시어머니 역시 똑같은 나오미였지만, 룻에게는 시어머니의 삶과 믿음이 귀하게 보였지만, 오르바는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특히 단순히 자기 친정 모압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놓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룻과 오르바의 삶이 갈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22절의 말씀에서 “돌아온 그때가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추수 시작할 때”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살펴보면, ‘케차르’(수확하다, 거두다)와 ‘삐트 힐라트’(처음, 새로운 시작)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수확한다”는 의미가 신령한 의미로 읽혀집니다. 나오미가 룻과 함께 돌아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뿌려 놓은 것을 추수할 시기에 돌아왔더라는 것은, 추수할 시기에 돌아왔으니 보리 이삭이라도 주워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준비되었다는 의미이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돌아오는 나오미를 향해서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거두는 시기가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며, 이제 너의 마라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물로써 기도하고 붙들었던 것들을 이제는 네가 수확하고 거두는 시기가 돌아왔다는 것입니다.(할렐루야!) 우리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불행 끝! 행복 시작 !, 그래서 나오미에서 마라가 되었다가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여 ! 이제 은혜를 더하여 주사, 이 고난의 시기가 빨리 끝나게 해주시고, 다시 눈물로 다시 간절하게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린 것에 대하여, 열매를 수확하는 결실이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는 말은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나오미의 축복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고, 다시 나오미로 나아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13절의 말씀에서,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참 보아스의 이 넉넉한 마음이 그 이웃을 향한 귀한 마음 씀씀이가 그 룻에게 위로가 되었기에, 당신은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힘이되었다는 말이며, 나중에는 그것이 보아스에게 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시는바대로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해서 다윗 왕가의 가문을 이루는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맺겠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보아스가 룻에 대하여 얼마든지 다른 시각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위로 하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을 때에, 룻은 “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이었고, 그것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믿음의 자세로 나아가서 모두가 이 마라의 시기를 지나서 나오미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의 삶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