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메이커 2020.04.05 17:24 조회 수 : 364
예배영상
https://youtu.be/8E2BSJooGZE
"그 앞에 있는 기쁨" / 히 12:1~2
사순절 마지막 주일이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 하고 외치면서 나뭇가지를 흔든 것이 종려주일의 유래가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성도들과 마주하지 못하고 영상으로 예배한지가 6주째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 동안은 장로님들과 예배를 드렸는데 오늘은 구역장님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 동안 구역을 챙기시고 릴레이 기도 독려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는가?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겠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 도는 꽃이라 해서 해바라기라고 합니다. 해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 해서 주바라기라고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크게 세 가지 기준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2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의 주가 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여 주신다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믿음의 주라는 말씀은 ‘아르케고스’ 라는 헬라어로 되어 있는데 ‘창시자’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시작이 예수님에게서 되어진다는 뜻이 있고 이것이 명사화가 되어지면 ‘아르케곤’인데 ‘지도자’ ‘지휘자’ 그런 뜻도 있습니다.
찬양대원들은 지휘자를 바라봅니다. 지휘자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그렇게 바라보아야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전케 한다’는 것은 ‘완성자’ 라는 뜻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완전체다’ 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믿음을 시작하게 하시고 또 그 믿음을 완성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이야기는 또한 ‘아포론테스’라고 되어 있는데 분사형으로 집중해서 본다. 계속해서 보아야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12장 1절에서는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에 비유하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읽은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경주를 다 마치고 이제는 허다한 증인들이 되어서 지금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마쳤으니 여러분들도 믿음의 경주를 잘하라, 푯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잘해서 여러분들도 승리자가 되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를 잘 하려면 푯대, 목표가 중요합니다. 신앙의 경주의 목표, 푯대는 누구냐? 바라보아야 할 분은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4:29-31 말씀을 보겠습니다.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깊은 밤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로 하여금 물위를 걷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걸어서 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고 베드로는 소리쳤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 그랬을 때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서 구원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느냐?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았을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이 흐트러져서 바람을 보고 물결을 보기 시작했을 때 물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기적도 중요합니다만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교훈이 있습니다. 무슨 내용이냐? 그것 아니겠어요. 방금 말씀드린 바대로 주님 바라볼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 바라보고 나아갈 때에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허나 방해되는 것들을 바라볼 때에 그것으로 인하여서 시험들더라. 그것으로 인하여서 실족되더라는 말씀입니다. 거센 바람을 봅니다. 풍랑을 봅니다. 물결을 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믿음의 실수를 할 수 있음이라. 실족할 수 있음이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주간입니다. 주님께 집중하여서 히브리서 3장에 기록된 말씀처럼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며 나아갈 수 있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한 주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6주째 영상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마음에 결심한 바가 있어서 교회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밤새워 철야 기도로 시간을 다 채우지는 못하지만 부목사님들이 오전 오후로 제가 밤으로 교회에서 있습니다. 저녁 8시 30분 이후에 교회에 와 있으니 시간이 참 많아요. 주님께 한편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 집중할 수 있구나! TV안 보아도 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묵상하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주심을 오히려 감사합니다. 여러분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지기를, 그래서 그래서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이런 저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거기 우리 마음 흔들리지 말고 주님께 딱 시선 고정하여서 나아갈 수 있는 예수 바라기들 더욱 될 수 있는 고난주간, 의미 있는 한 주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둘째,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세요.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절) 아시는 바대로 여러분 예수님이 진 십자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요. 치욕스러운 벌이었습니다. 당시 최악의 범죄자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시체 자체도 모욕을 받았습니다. 죽고 난 후에도 벌거벗겨진 채로 그렇게 매달아 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법에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십자가형에 처하지 못한다고 정함으로 자국민을 보호할 정도로 흉악한 것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 치욕과 그 고통을 우리 주님께서 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이 힘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숙명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게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택하실 수가 있었다는 말씀이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 깊은 곳에 있을 때에 배반한 가룟 유다의 안내로 인하여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가 왔습니다. 베드로가 급한 대로 칼을 빼어서 거기 온 사람 가운데 하나인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그 칼 집어넣어라. 칼 하나가 문제가 아니다 이거예요. 내가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군천사에게 집합! 내 아버지에게 말씀해서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군과 천사를 불러 올 수 없겠느냐? 얼마든지 전 세상을 상대할 수 있는 천군과 천사를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집합 시킬 수 있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방법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감당하신 것입니다. 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왕이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천군천사를 불러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주님이시라고 친히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주님께서 수용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주님께서 참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주간에 깊이 생각하고 붙들어야 될 말씀입니다.
셋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세요.
십자가는 고통도 고통입니다마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것은 그 치욕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모욕당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서 침 뱉었습니다. 채찍 맞은 아픔보다 어쩌면 그것이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더 아픔이었겠느냐? 견디기 어려웠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부끄러움을 주님께서 개의치 아니하시더라 이거예요.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그러시냐 하면... 오늘 성경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의 말씀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에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 그 때에’ 라는 책입니다. 사순절에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모든 분들이 힘들어 하는 이때에 그 책을 읽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향하여서 루케이도가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었다. 사랑하는 제자도 없었다.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렇게 예수님을 위하여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생각지 않은 한 사람을 예비해 두셨는데 그 사람이 그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거예요. 함께 하는 거예요. 주님을 위로해 주는 거예요. 주님을 변호해주는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구냐?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였다 라고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마음에 ‘쿵’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구나!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에 예수님과 나란히 달린 두 강도 가운데 한 강도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메시아냐? 그리스도냐? 그렇다면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 그렇게 했을 때 옆에 있는 한 강도가 이야기합니다.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너는 그런 말 하지 마라. 너와 나, 우리는 우리의 죗값에 대하여 합당한 벌을 받거니와 이 사람을 보니까 이 사람은 죄가 없으시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서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그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 좀 기억해 주십시오. 그럴 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저 천국에 이르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바로 옆에 있었어도 보는 시각이 다른 거예요. 그는 보았습니다. 야, 정말 이분은 죄가 없구나! 그는 보았습니다. 그는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 가까이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서 저들을 위하여서 하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 울부짖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묵묵히 그 십자가에서 참아내시는 주님! 그 모든 모욕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주님을 보고 루케이도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떠나고 부인하고 사랑하는 제자들도 아무도 없었다. 누구하나 예수님을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하나 예수님을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십자가 강도가 주님을 변호해 주는 거예요. 이 사람은 죄가 없어. 우리는 우리 죄에 합당한 벌을 받지마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참으시고 그렇게 견디시는데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그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견디시는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그랬다 이거예요. 기쁨을 위하여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참아내시고 그 모든 모욕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다 받으신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그 앞에 있는 기쁨이 무엇이냐? 오늘 말씀의 제목을 삼았습니다. ‘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즐거움이라는 뜻이죠. 궁극적으로 이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말합니다. 보람이 있는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일을 다 마치고 해놓았을때에 내가 참 이 일을 잘했어. 그때 있어지는 희열 기쁨 이것을 카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카라라고 설명을 하는데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서 그 십자가 다 견뎌내셨다 이거예요. 외롭게 감당하셨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 앞에 있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아시잖습니까?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내가 이 십자가를 짐으로 인하여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위하여서 그 보람 있는 기쁨을 위하여서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참으셨다. 견디셨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에 보면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서 많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특별히 53장 11절 말씀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이사야 선지는 그렇게 주님을 예언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그 모든 죄악을 친히 담당한 그 거룩한 수고를, 자기 영혼의 수고를 만족하게 여기셨다. 그런 거지요 여러분.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자기 영혼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수고했다. 보람 있었다. 참 잘했다. 이것이 여러분 예수님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음이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오늘 고난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도 앞에 있는 기쁨과 소망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게께서는 피할 수 있으면 파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마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나 당신의 뜻을 좇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왜냐고요? 그 십자가 너머에 있는 소망 그 십자가로 인하여 주어지는 모든 세상을 구원하는 그 기쁨을 바라보면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고난 주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6장 21-22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의 삶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 고통의 값으로 주어지는 이 기쁨을 비유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 16:21-22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해산의 고통 여러분 아시잖아요. 그러나 그 해산 후에 찾아오는 생명으로 인한 기쁨. 사람 난 기쁨으로 인하여서 그 고통 생각지 아니한다 이거예요. 주님께서 생명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었는지 그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후에 그 앞에 있는 기쁨. 저와 여러분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 기쁨을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 지셨습니다. 우리 이 시간 고백해 봅시다. 한 번 말해봅시다. 주님! 고맙습니다.
코로나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참 힘들어요. 그렇지만 우리 그 소망을 가집시다. 이 고통의 시간도 지나가리라. 끝이 보입니다. 여러분. 지난주도 말씀했습니다마는 장하다 대구! 세계에서 그렇게 대한민국이 여러 가지 의료 시스템과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서 하는 이것을 칭찬해준다. 인정을 해준다. 그 중에 대구가 있다. 고마운 거잖아요. 성도님들 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활주일 아침에 다시 만나는 생명과 환희, 승리의 그 날을 바라보면서 한 주간도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바라보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바라보면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입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 가운데 예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이거예요.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거예요. 주님은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흘 후에 이 성전을 다시 지으리라. 그래서 부활하시고 그 말씀대로 주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 예수님 바라보자 이거예요. 십자가에서 끝난 예수님 아니잖아요. 무덤 속에 뉘인 것으로 끝난 예수님 아니셨잖아요. 그렇게 예수를 바라보는데 예수님을 소망하는데 궁극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통치자 왕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 이거예요. 바라보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습니다. 내가 너희를 그리로 인도하리라. 너희도 거기에 있게 될 것이라. 고난주간 한주간 잘 지내시고 부활의 아침에 그 주님의 기쁨, 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그렇게 초대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여러분 패자들을 바라보면은 패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승자를 바라보면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패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마침내 그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 주님 바라보고 오늘의 어려움을, 믿음 생활에 때로는 힘든 일이 있어도 넉넉히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초대교회는 정말 핍박 많이 받았습니다. 네로 시대뿐만 아니라 300년에 걸쳐서 얼마나 그렇게. 초대 교회는 믿음으로 승리한 많은 성도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승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로 그들이 순교를 당합니다. 화형도 당하고 짐승, 사자들의 밥이 되기도 하고 이제 그렇게 묶여 있는데 어린 아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데... 참혹한 현장을 보고, 짐승들의 밥이 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아이가 우왕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애야 눈을 감으렴. 그리고 하늘 나라를 바라보렴. 우리 잠시 후에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될거야.” 할렐루야! 비단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순교자 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나라 바라보는 거예요. 십자가를 넘어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믿음의 온전한 경주를 하라. 그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난 주간 시작됩니다. 성도님들 처처에서 생활하시고 예배하실 때 고난 주간 한 주간만은 주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주님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참아주셨습니다. 감당해주셨습니다. 그 모든 치욕과 부끄러움을 주님께서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왜냐고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람 있는 기쁨을 위해서 참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