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기사 2019.06.14 22:06 조회 수 : 534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사 28:9~13)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의 시작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으나, 오늘날은 “오직 설교”(sola sermo)가 되었습니다. 청중들은 자기의 마음에 맞는 말씀에 “은혜 받았다”고 화답합니다. 그리고는 “그 목사 설교 잘하네”라고 칭찬도 해줍니다. 이런 일은 구약 성경에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I. 이사야는 말더듬이였다.(9절~10절)
모세도(출 4:10), 예레미야도 달변가가 아니었습니다(렘 1:6). 그리고 이사야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이사야가 말이 어눌하다고 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의 말투를 흉내내면서 놀렸는데, “경계에 경계를 떠하고~(짜우라 짜우, 짜우라 짜우, 까우라 까우 까우라 까우)”(10절)라고 놀립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해석상 앞뒤 문맥이 맞지 않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것이 이사야의 어눌한 말을 흉내낸 의성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진 말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여기서는 이말 조금, 저기서는 저말 조금”(쩨 에르샴 쩨 에르샴)이라는 말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으며, 더듬거리는 구제불능의 웅변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이사야가 설교를 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9절)
II. 너희가 놀리는 그 말로 너희가 심판 당할 것이다.(11절)
이사야는 청중들의 기대를 위해서 유창하게 설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듬는 말과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의 말놀음입니다.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은 이사야를 놀리기 위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사용한 단어인데, 그 뜻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면 매우 무서운 말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말을 더듬는다는 뜻으로 “바르바로스”(barbaros)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11절의 말씀을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이사야를 말더듬는 이방인과 같다고 놀렸느냐? 하나님은 너희들을 진짜로 이방인들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이다.”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서 “이 바보야 !”라고 놀린다면, 하나님은 그 욕한 사람을 “바보”를 통해서 혼내주신다는 뜻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이방인처럼 말더듬이라고 놀렸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III.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참된 안식을 말씀하셨다.(12절)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수용할 만한 수준의 진리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이지”라는 수준으로, “이 정도는 되어야 안전하지”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하나님은 진정한 안전과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12절) 참된 안식은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것임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된 뜻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하며, 혹시 청중들이 너무나 싫어해서, 이 말을 전하면 그들에게 맞아죽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중은 어리석은 예루살렘사람들처럼, 비꼬아서 ‘이방인 같다’라고 놀리다가, ‘사나운 이방인들’에게 얻어맞고 멸망당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안식과 그 상쾌함(평강)’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요. 그것을 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 이사야는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을 더듬었고,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채 흥분해 있었으며, 여러 주제들을 이리저리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으며,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말씀을 “준비한 자”가 아니었다. 이사야는 말씀을 “본 자”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말씀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여주시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도는 설교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선포하는 사람에 집중(아멘)할 것이 아니라, 선포되고 있는 말씀에 집중(아멘)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