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메이커 2020.03.08 20:22 조회 수 : 318
예배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M512Pvr9yo
셀라 하마느곳 / 삼상 23:15-18, 28-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세 번째 주일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늘어나는 확진자 뉴스에 온 나라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들과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의료진들까지 모두가 24시간이 부족하다는 심정으로 비상근무를 서고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영적 비상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낮에는 교역자들이 교회를 지키며 기도의 줄을 이어가고, 또한 전구역원들이 릴레이 기도에 동참을 하고, 밤9시 부터는 제가 교회에서 자면서 함께 마음을 나누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구역장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드렸습니다. 구역원들의 안부를 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매주일 예배드리러 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줄 몰랐습니다.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니 갈급한 그리움이 더 간절합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목회자의 심정도 똑같이 성도님들을 뵙고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이 시간 각각의 처소에서 함께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연세 많은 권사님은 이제 이 나이에 죽어도 좋으니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잠시 예배당을 닫고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게 됨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또 어떤 권사님은 “목사님 저 그저께 아무도 모르게 교회 한바퀴 돌면서 기도하고 왔어요”라고 교회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전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예배당에 대한 그리운 마음은 마치, 바발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우리가 울었도다’라는 그 마음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도님들의 마음과 신앙적인 자세가 그렇습니다마는 일반 시민들도 평범했던 일상생활, 당연시 했던 일상생활이 그렇게 고맙고 소중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만나면 서로 악수하고 반가움을 나누었던 그것조차도 어색해져버렸습니다. 웃으며 함께 시장보러 갔던 그 길도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가지를 못합니다. 교회에서 철야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침 10시를 전후해서 우체국 앞에서 마스크를 구입하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표정들이 그렇게 밝지를 못해요. 긴 줄을 서 있으면서도 무표정하게 서로 시선을 외면하면서 서 있는 모습들... 주님 언제까지 우리가 이래야 됩니까?
오늘 본문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서 도망다니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그 시기심과 분노심으로 인하여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말하기를 증언하기를 단순히 사울이 시기심과 분노로 인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하고 사울을 충동케 하여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해석하기를 단순히 왕의 자리를 두고서 그렇게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로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마귀가 그를 충동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교훈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고난의 사태를 신앙의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영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되겠고 해석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깨달을 수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예배에 대한 그리움, 성도들 그렇게 함께 울고 웃으며 드렸던 예배, 교회에서 나누었던 교제들, 당연한 줄 알았는데 소중함의 의미가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생활에 대한 감사, 말씀을 드렸다시피 여러분,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며 차 한 잔하며 나누었던 그 교제에 대한 소중함을 새롭게 생각을 해봅니다. 마스크 한 장 그렇게 귀한 줄 알았나요? 흔하디 흔한 물건으로 취급했는데 아~ 여기도 그렇게 귀하게... 당연시 여겼던 일상생활에 대한 오히려 감사를 회복할 수 있는 은혜가 되기를 신앙적인 교훈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또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마웠었다. 참 감사했구나. 어느듯 우리는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죠.
오늘 본문 28~29절을 보면 다윗이 어떤 바위 속에 숨어 있다가 그 바위의 이름을 “셀라 하마느곳”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셀라’는 ‘바위’라는 뜻이며, ‘하마느곳’은 ‘경계하다’ ‘분리되다’라는 의미여서 “분리하는 바위”, “경계점의 바위”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왕을 피하여서 마온 황무지로 도망을 갔습니다. 전군을 동원하여 사울이 다윗의 뒤를 추격해옵니다. 이제는 온전히 마온 황무지가 포위를 당하여서 다윗이 사울에게 붙잡히기 직전이었습니다. 겨우 간신히 한 바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사건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블레셋의 군대를 사용하셨습니다. 한 전령이 사울에게 쫓아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왕이여 다윗을 잡는 것도 급하겠습니다만 더 급한 일이 터졌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할 수 없이 사울이 그 군대를 움직여서 퇴각을 하더라. 다윗 잡는 것을 포기하고 바위에 숨어 있던 다윗이 일어나서 그 바위를 붙잡고 이름을 붙이는 거지요. 이 바위는 셀라 하마느곳 이라 하라. 경계의 바위다. 분기점의 바위다. 그래서 그 바위를 벗어나서 엔게디로 다윗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엔게디 요새로 가니라. 오늘 성경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번에 성지에 가서 다시 한번 엔게디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엔’이라는 것은 ‘샘물’이라는 뜻입니다. ‘게디’라는 것은 우리 나라 같으면 ‘산양’종류의 그러한 짐승입니다. 그러니까 산양들이 먹을 수 있는 샘물이 있는 황무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도망자 다윗으로서는 참 피난하기 좋은 곳입니다. 곳곳에 계곡이 있고 굴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런 엔게디로 갔다는 것이지요. 그 경계선에 있는 바위를 다윗이 ‘셀라 하마느곳’이라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위험한데서 이제는 안전한 곳으로 갔다는 거예요. 죽음을 벗어나서 삶의 경계 지역으로 넘어갔다는 말씀이예요. 위기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피난처 하나님의 품과 같은 엔게디로 갔다 이거예요. 분리되는 시점.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기도합니다. 이번 주간을 기점으로 이 코로나 사태가 수그러드는 분기점, 셀라 하마느곳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축원합니다.
셀라 하마느곳; 분기점이라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24장으로 넘어가면 또 다시 사울에게 추격을 당하던 다윗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그러나 아시는바대로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그를 살려줍니다. 그리고는 계곡너머에 있는 사울에게 다윗은 나에게 당신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당신도 나에게 그렇게 좀 대해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기점; 셀라 하마느곳 이후의 다윗의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다윗은 신앙 좋은 사람이었지만, ‘셀라 하마느곳’ 후에 다윗은 모든 것에 있어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셀라 하마느곳 바위에 이르기 전에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봅니다. 그는 다윗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그 영혼이 헝크러져서 시기와 분노로 사탄 마귀의 충동으로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 쫓아왔지만, 그 사이에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16절의 말씀과 같이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했다는 것입니다. 위험과 고난에 처해서 지쳐있는 어쩌면 그 삶의 줄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다윗에게, 요나단은 격려하고 용기를 주면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되 힘있게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 말로 힘있게 의지한다는 것을 ‘와예 하체크’라고 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교회의 중직자들, 그리고 구역원들, 구역장님들에게 부탁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친구들이 다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욥이 고난과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들은 오히려 정죄를 했습니다. 욥에게 오히려 고통을 더했습니다. 이 범죄가 이 고난이 이 어려움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물론 여러분 그것도 따져보아야 겠습니다마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며, 서로 간에 격려이고, 힘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줄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줄을 든든히 더욱 붙잡고 나아갈 수 있는 이 시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린도후서 1:8-9절 말씀에서 살아갈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던 바울도,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면서 그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오직 주님만 의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17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이 왕으로서 군대를 동원하고 다윗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지만, 사울의 손이 너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의 손이란,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손이지만, 사울의 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손이 너와 함께하고 너를 보호해주실 것이라는 이 믿음의 고백이 훗날 다윗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역대상 29장 12절,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이렇게 다윗을 격려하는 요나단의 소리가 하나님의 천둥같은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내 손이 너화 함께 하느니라. 내 손이 너를 지켜주리라” 아멘!
예레미야 18장 5-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친 예레미야를 힌놈의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큽니다. 사울의 손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손이 그를 보호하시면 저 토기장이가 흙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처럼 그렇게 사울 왕의 손이 너희를 주무르거나 다윗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 주간이 주님의 손과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나단의 격려는 한걸음 더 나가갑니다. 17절 하반절의 말씀에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이, 요나단은 자신도 알고 아버지 사울도 알고 있는 것이, 이 고난의 때가 지나가면 결국은 네가 왕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너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소망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상황은 곧 지나가고 끝날 것입니다. ‘셀라 하마느곳;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힘있게 전적으로 의지합시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교회를 여러분의 삶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오늘 힘든 것만 보지 말고, 다시 더하여 주시는 은혜의 자리, 일상의 삶으로 돌아 올 때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주님을 섬기고 나아갈 수 있는 이 한 주가 되기를 ‘셀라 하마느곳’의 한 주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선포합니다. 아멘.